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벨라루스 관계 (문단 편집) === 근세 === [[파일: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1561년 지도.png|width=43%]] [[파일:Irp1569.jpg|width=50%]] * 루블린 조약 전후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 변화.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노란색)였던 우크라이나 중부-동부 지역이 폴란드 왕국 영토(연노랑색)으로 이동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루블린 조약]] 이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모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벨라루스 지역은 그대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로 남았으나 공식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역였던 우크라이나 중부와 동부 지방 상당수가 폴란드 왕국 측으로 넘어갔다. 폴란드 측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정교회 신도들을 [[동방 가톨릭 교회]]로 강제 개종시키는데, 이는 근대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및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의 기원이 되었다. 결국 [[코사크]]들이 자치를 누리던 우크라이나 중부/동부 이외 대부분의 지방은 동방 가톨릭으로 개종된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각 도시 자체는 원칙적으로는 거의 독립된 작은 개별 공화국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고립된 상황 때문에 거의 모든 소시민신분 주민들은 예외 없이 귀족이나 지주들의 행정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소시민들은 의회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법 과정이나 방향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입법 권한은 지주와 귀족들 손에 있었고, 귀족들은 지주로서의 자기 이익을 위해 소시민들의 권리를 체계적으로 제한했다. 이렇게 되자 결국 도시는 외부에서 온 세력, 특히 유대인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이는 폴란드 귀족 경제에 다른 누구보다도 유대인들이 잘 적응했기 때문이었다. >---- > 우크라이나의 역사 /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한편 중세 이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는 폴란드와 함께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 되었다. 본래 우크라이나는 [[키예프 루스]] 시절부터 [[동로마 제국]] 및 [[하자르 칸국]] 등지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는데, 이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현지 통치자들[* 단순히 하자르 칸국이나 [[몽골 제국]]같은 '외부' 지배자들 뿐만 아니라 현지의 수많은 루테니아계 공국의 지배자들을 포함함.]의 호의를 얻어 무역과 금융에 종사하였다. 물론 이때도 지배층으로부터 호의를 얻었다 뿐이지, 현지 주민들로부터는 눈칫밥을 얻어먹는 처지였고 종종 반유대인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113년에는 키예프의 유대인이 현지 주민에게 재산을 약탈당했다.] 11세기 이래 우크라이나는 남쪽과 동쪽뿐만 아니라 서쪽에서도 유대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동유럽으로 보다 나은 경제적 기회를 찾아 이주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서유럽에서 [[반유대주의]] 폭력[* 예를 들어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포그롬]]이 빈발했다.]과 인신자유에 대한 위협이 점증하였으므로 이주했다. 서유럽 유대인의 이주 물결이 가장 빨리 닿은 [[폴란드 왕국]]에서 유대인들은 귀족과 농민들 사이의 중간계층(상인, 수공업자 등)으로 자리잡았다. 14세기 이후 폴란드 왕국이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폴란드와 연합한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연스레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으로 유입되는 유대인들도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 정착한 유대인 농민들은 농노들에 비해 훨씬 가벼운 조세 부담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반면에 농노들은 일주일에 8인일을 부역할 것이 요구되었다) 농노 계층이 상공업 종사가 제한되고 교역이 금지된 것에 비해서 유대인들은 교역에 제한이 덜했다. [[근세]]에는 유대인의 60~80%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한 나라에만 몰려있었을 정도였고, 이들 대부분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에서 번영했던 것이다. 물론 중간 계급으로서 유대인 공동체는 가장 낮은 계급으로 머무른 농노들과 필연적으로 갈등을 빚게 되었고, 여기에 우크라이나에서는 농노 및 정교회 사제, [[코사크]]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지배층과 종교 갈등까지 겪으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앞잡이로 인식된 유대인들이 [[포그롬]]의 희생양이 되었다.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노제가 개악되고 러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벨라루스 전역이 초토화된 적이 있었는데 때문에 많은 벨라루스인 난민들이 꾸준히 남쪽으로 탈출하여 우크라이나 [[코사크]]에 합류하였다. 우크라이나의 하르키우 지역은 벨라루스계 조상을 둔 사람들이 많기로 알려져 있다. 코사크에 한해서 정교회를 믿을 자유를 보장하던 폴란드 측에서 다시 코사크들의 자치권을 줄이고 동방 가톨릭을 강요하자 코사크들은 [[보흐단 흐멜니츠키]] 대봉기를 일으켜 [[루스 차르국]]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